Chapter 94
Chapter
까득-
고요한 침묵이 목을 조여온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철컥거리는 사슬 소리가 마음을 짓누른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이곳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시계도 없는 탓에 알 수 없었다.
다만 까마득한 세월이 흐른 듯한 공허함 속, 나를 갉아먹는 지독한 고독에 손톱만을 물어뜯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온다고 했잖아… 다시 온다고 했잖아…! 온다고, 온다고 했잖아… 온다고…”
거짓말쟁이.
릴리안, 네가 성녀라고 할 자격이 있어?
분명 다시 찾아온다고 했으면서, 이렇게 사람을 방치하고 굶겨도 되는 거야?
‘이럴 거라면 차라리 죽게라도 내버려 두던가…!’
지독한 고독 속에서 밀려오는 허기와 갈증.
릴리안이 떠난 뒤로 아무것도 먹지 못한 내 몸은 매 순간 속을 긁어내는 듯한 고통을 내리쳤다.
그럼에도, 죽지는 못했다.
이곳에 깃든 이 빌어먹을 힘이 내 몸을 치유하며 영양분과 물 없이도 생명을 이어가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통만큼은 치유하지 못해, 뱃속이 갉아먹히는 듯한 허기만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토록 괴로워하는 진짜 이유는 배고픔도, 갈증도 아니었다.
“외롭다고…”
지독한 외로움.
나에게 언제나 가장 치명적인 독은 외로움뿐이었다.
전생의 어머니는 매일같이 나를 학대했지만, 적어도 나를 혼자 두진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가 좋았다. 매일이 지옥 같아도, 혼자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죽인 것과 다름없는 어머니도, 이럴 때마다 위로의 말을 건네주던 친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력하게 몸을 웅크린 채 릴리안이 다시 찾아와 주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더 흘렀을까.
어김없이 손가락을 깨물며 초조함에 괴로워하던 그 순간.
덜컹—
요란한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린 문 너머로, 이곳의 어둠과는 전혀 다른 화사함을 품은 분홍빛 눈동자가 나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잘 지냈어요, 티나?”
“리, 릴리안…!”
그녀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발을 묶은 쇠고랑이가 단단히 나를 붙잡고 있던 탓에 땅에 엎어지고 말았다.
릴리안은 안타까운 얼굴로 다가와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조심하셔야죠, 티나. 다치면 안 되잖아요.”
나는 릴리안의 허리에 다급히 손을 두르고 그녀의 품에 안겼다.
강하게 고동치는 릴리안의 심장 소리가 들리자, 나를 괴롭히던 고독이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후후, 이렇게 애교를 부리기도 하시네요, 티나.”
내가 말없이 릴리안의 품 안에서 몸을 살짝 뒤척이는 사이,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릴리안의 따뜻한 체온이 스며들며 서서히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한다.
정신이 차츰 돌아오자, 나는 두 손으로 릴리안을 강하게 밀어내며 그녀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왜,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분명 다시 온다고 했잖아!”
“음, 제가 마지막으로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시나요?”
“뭐…?”
“다음 훈련은 식사 예절로 한다고 했잖아요?”
릴리안은 반짝이는 분홍빛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티나가 별로 배고파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 훈련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일부러 이틀을 기다린 거랍니다.”
한 일주일은 흐른 줄 알았는데, 고작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아니, 그것보다.
“너…! 지금 나를 짐승 취급하려는 거야?”
“이미 말했잖아요, 티나. 당신은 제 애완동물이라고요.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괴로운 건 당신일 거예요.”
“이, 이 망할 년이…”
“후후, 아직도 말이 거칠군요.”
릴리안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그녀가 나를 두고 다시 나가버릴까 두려워 몸이 흠칫 떨렸지만, 다행히도 릴리안은 문 옆에 두었던 식판을 들고 다시 나를 향해 다가왔다.
“오늘은 드셨으면 좋겠어요.”
식판 위에 놓인 것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프와, 맑은 유리잔에 담긴 투명한 물.
이전과 같은 식사였지만, 허기에 굶주린 나의 몸은 음식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어때요, 티나? 드실 생각 있으신가요?”
“…”
마른침이 목 뒤로 넘어갔다.
신성력이 몸을 멀쩡하게 유지해 주어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허기와 갈증은 여전히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음식을 먹어치우고 싶었다.
그런데도, 릴리안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영애들의 손에 기대어 아양을 떨며, 그녀들이 주는 간식을 입으로 받아먹었던, 애완영애로 살아온 지난날들과는 달랐다.
그때는 내게 분명한 목적이 있었고, 영애들의 등을 이용한 거였지만, 지금은 정말로 애완동물처럼 전락하는 기분이었다.
결국 우물쭈물하는 나를 바라보던 릴리안이 안타까운 눈빛을 띠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은 이른가 보네요. 그럼, 다음에 다시 올게요, 티나.”
“잠, 잠깐만…”
나는 릴리안의 발목을 급히 붙잡았다. 그녀의 의아한 시선에 눈을 피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먹을게… 스스로 먹을 수 있게 해줘…”
“안 돼요. 제가 직접 먹여야 해요.”
돌아온 대답은 차갑도록 단호했다.
“내, 내가 먹겠다는데 왜 그래!”
“주인인 제가 애완동물의 식사를 직접 챙겨야 하는 법이거든요.”
릴리안의 눈동자는 흔들림 하나 없이 단호했고, 타협의 여지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정말 그녀는 나를 애완동물로서 취급하려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또다시 끝없는 내적 갈등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릴리안의 뜻을 따라야 하나?
그러나 그렇게 되면 결국 그녀에게 굴복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아니, 굴복이 아니야.’
속으로 자신을 달래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내가 다른 영애들에게 애완견처럼 아양을 떨었던 이유는 다른게 아니었다.
그녀들에게서 얻어낼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재산, 인맥, 권력.
셋 중 하나라도 없는 이었다면, 나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무시했을 것이다.
릴리안 또한 결국 다른 영애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이 답답하고도 암울한 공간에 갇혀버린 지금,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릴리안뿐이었다.
그것은 곧, 내가 가장 많은 것을 뜯어낼 수 있는 대상이 릴리안이라는 뜻이었다.
기본적인 의식주는 물론, 이 한 줄기 빛도 들지 않는 음침한 곳에서 벗어날 유일한 열쇠가 릴리안에게 달려 있었다.
‘…그녀를 물주라고 생각하자.’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릴리안이 내 손에 의해 이용당할 뿐이다.
그녀의 뜻에 적당히 어울려 주며 서서히 신뢰를 쌓아올린 뒤, 릴리안을 다른 영애들과 다름 없는 호구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는 날이 온다면, 그때야말로 릴리안의 숨통을 끊어 버릴 것이다.
릴리안을 죽이고, 지옥으로 가면 된다.
이 결심에 다다르자, 복잡하게 얽혀 있던 머릿속이 한순간에 정리되며 맑아졌다.
나는 다시금 찾아온 여유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대에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릴리안을 응시했다.
“…좋아. 네가 먹여주든가.”
“어머, 현명한 선택이군요, 티나.”
릴리안의 긴 속눈썹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아름다운 눈웃음이 그녀의 얼굴을 수놓았다.
“식사 전에 해야 할 것은 해야겠죠?”
그녀는 조심스럽게 식판을 가져와 자신의 앞에 내려놓고, 무릎을 낮춘 채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 티나. 손.”
“…”
“티나?”
내가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릴리안이 나에게 이용당할 뿐이다.
속으로 수없이 되뇌며 마음을 다잡았다. 떨리는 두 손을 억지로 모아 릴리안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정말 잘했어요, 티나. 사랑해요.”
“…”
“제 말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당신은 정말 소중한 존재예요, 티나.”
릴리안은 환한 미소를 머금고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내 앞에 손바닥을 내밀며 속삭였다.
“자, 티나. 턱.”
“…뭐라고?”
“턱을 올려주시면 돼요.”
“…”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반항심을 억누르고, 조용히 그녀의 손바닥 위에 턱을 올렸다.
그러자 릴리안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내 턱을 살며시 간질였다.
“읏… 그만해…”
한동안 내 턱을 간질이던 그녀는 환히 웃으며 나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잘했어요 티나.”
“….”
릴리안은 양반다리로 바닥에 앉은 뒤, 자신의 무릎을 손바닥으로 두번 내려치며 양팔을 벌렸다.
“자, 이리 앉으세요 티나. 제가 밥 먹여드릴게요.”
“…꼭 거기 앉아야 해?”
“네.”
모든 것이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속으로 결심을 다지며 릴리안의 양반다리 사이에 조심스럽게 앉아 그녀의 품에 기대어 몸을 맡겼다.
릴리안은 나를 감싸 안고 백허그를 하듯 두 팔을 둘렀다. 그녀의 숨결이 귀를 스치며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갑자기 이렇게 순종적이게 됐네요. 정말 굴복한 걸까요?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요?”
“그저… 배가 고플 뿐이야.”
“흐응, 그런가요.”
릴리안은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물이 담긴 유리잔을 한 손으로 들고 나에게 내밀었다.
“물부터 드릴게요. 자.”
나는 고개를 약간 들며 입술을 벌렸다.
며칠 동안 입에 물 한 방울도 대지 못한 채 목이 바싹 말라붙은 느낌이었다.
건조하고 메마른 입술이 갈라지고, 갈증은 점점 더 날카로운 고통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릴리안이 유리잔을 기울이자, 투명한 물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려 입술에 닿았다.
차갑고 상쾌한 물이 입안으로 퍼지며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리자, 갈증은 잠시나마 가셔졌고, 긴장이 풀린 몸은 조금씩 떨려왔다.
하지만 참 얄굽게도, 그것은 너무나도 짧았다.
아직 나의 갈증이 해소되기도 전에, 릴리안은 곧바로 유리잔을 다시 걷어냈다.
갈증이 남아있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혀를 내민 채로 릴리안의 손을 붙잡았다.
“조, 조금 더 어 주면 안 돼…? 목마르다고…”
왜일까.
나를 바라보는 릴리안의 분홍빛 눈동자가 흠칫 떨려왔다.
그녀는 물방울에 촉촉하게 젖은 나의 혀를 바라보더니,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서는 다시 유리잔을 기울어주었다.
“…자, 드세요.”
다시금 청량한 물이 목 뒤로 넘어간다.
꿀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생기를 잃은 나의 입술이 다시 촉촉해져갔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와 턱 아래로 흐르는 물방울을 닦고,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
“…”
릴리안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의 호의를 어떻게든 이용할 수 있도록 호감을 얻어야 할 테니까.
릴리안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가, 잠시 후 옅은 미소를 띠며 다른 그릇을 내밀었다.
“수프, 드실래요?”
갈증이 해소되자, 허기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달콤한 향과 함께 자욱한 김을 뿜어내는 따뜻한 수프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릴리안은 조심스럽게 수프 한 숟가락을 내게 내밀었다.
너무도 배가 고팠던 나는 뜨거운 김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채, 곧장 입술을 벌려 수프를 한입에 삼켰다.
“으읍!”
생각보다 훨씬 뜨거운 온기가 혀를 덮쳐와, 뜨겁게 달아오르는 입 안에 순간 눈물이 찔끔 맺혔다. 나는 무심결에 혀를 내밀어 화끈거리는 열기를 식히려 애썼다.
“하, 하아… 흑, 뜨, 뜨거워…”
“괜, 괜찮으세요, 티나? 오래 데워서 그런가 봐요. 아직 덜 식었나 보네요.”
“흐으… 흑…”
희미한 신음이 입밖으로 새어나왔다.
입안에 맴도는 열기를 조금이라도 가라앉히려 애쓰며, 무심결에 릴리안을 째려보았다.
이렇게 뜨거운 수프를 식히지도 않고 내민 건지 한바탕 욕을 하고 싶었지만, 릴리안의 호감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금 머릿속에 맴돌아 나를 가로막았다.
결국 나는 화조차 내지 못하고 애절하게 눈꼬리를 가라앉히며 간절한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뜨, 뜨거워서… 조금만 식혀서… 주면 안 될까…?”
살짝 데인 혀를 내민 채로, 애달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 이번에도 릴리안은 묵묵히 나의 혀를 응시할 뿐이었다.
깊은 어딘가,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리더니 시선을 피했다.
“하, 꽤 좋은 시도였어요. 하지만 저한테는 통하지 않아요.”
“…응? 안 돼…? 너무 뜨거워서… 한입에 안 들어가는데…”
“….”
“리, 릴리안이…식혀주면…잘 먹을테니까…”
내 애처로운 눈빛이 통했을까.
릴리안은 입술을 몇 번 짓씹으며 잠시 망설이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좋아요, 식혀서 드릴게요.”
“윽?!”
그 순간, 릴리안의 손이 내 턱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움켜쥐더니, 그대로 나의 고개를 옆으로 강하게 돌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이 크게 떠졌고, 바로 앞에 자리한 릴리안의 화사한 분홍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이내—
“우읍?!”
릴리안의 입술이, 벌어진 내 입술 사이로 거침없이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그녀를 밀쳐내고 싶었으나, 이미 릴리안의 다리와 팔이 내 몸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흡… 흐읏… 웁…!”
당황스러운 감각에 눈가가 떨리는 사이, 그녀의 입술을 통해 수프가 서서히 내 입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이미 릴리안의 혀에서 열기를 잃은 탓에 넘어온 수프는 이전만큼 뜨겁지 않았다.
‘미, 미친 거 아니야…?!’
내가 속으로 한바탕 욕설을 퍼붓는 동안, 릴리안은 이글거리는 눈빛을 내게 던지며 나직이 말을 걸었다.
“하아… 티나, 흘리지 말고 다 삼키세요.”
“으읏….”
촉촉하고 낮게 깔린 릴리안의 목소리.
입 밖으로 수프를 뱉어내고 싶었으나, 그녀가 완전히 내 입을 틀어막은 탓에 결국 나는 수프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꿀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