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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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구호가 부목을 풀었다. 검을 휘두르며 당당하게 외쳤다.
“삼십호! 한 판 떠요오오!!!”
그래서 붙어줬다.
목검에 두들겨 맞은 이십구호가 바닥을 기었다.
“왜…왜 더 강해진 건데…? 나, 나도 절정인데…검기 일으킬 줄 아는데에…!”
“사지에서 목숨을 건 보상입니다.”
“저도 목숨 걸었거든요?!”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하지만 사마세가를 조용히 떠나기 직전,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탈혼검 노하천.
그가 그의 제자를 대동한 채 나를 찾았다. 얼굴을 마주치자마자 맞이한 건 깊게 숙인 고개였다.
“내가 오해했네. 자네에게 주워담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군. 미안하네.”
탈혼검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사마악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을. 그가 몸을 담은 나찰종조차 이 일의 진의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까지.
“괜찮습니다. 나찰종은 그저 부름에 응답한 것뿐 아니겠습니까.”
“…크흠. 인품 또한 괜찮군. 말에 군더더기가 없어.”
탈혼검이 슬쩍 내 팔을 더듬었다.
“…어르신?”
“단련이 잘 되어있군. 기초가 잘 잡혀 있어. 진명아. 보고 있느냐? 기초가 이리 잘 잡혀 있으니, 무리해도 육체가 반응하는 거다. 재능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영역이지.”
“예. 보고 있습니다. 스승님.”
극진명.
탈혼검의 제자인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적의라는 게 뭔가…조금 애매한 느낌이랄까.
“삼십호. 이십구호와는 어떤 사이십니까?”
“……? 동료…입니다만.”
“그뿐입니까?”
“예. 그뿐입니다.”
“그렇군요.”
극진명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왜 풀렸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되물었다.
“그건 왜…?”
“검을 섞는 날이 많다 보니 궁금해지더군요.”
“이십구호가 부목을 푼 건 어제 아닙니까?”
“말로는 많이 섞었습니다. 논검(論劍)이라고도 하죠. 그 날카로움이 비무와 같으니, 검을 섞었다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그만큼 소저와 가깝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요.”
“맞는 말입니다만…”
말속에 가시가 살짝 숨어있었다. 나는 그것이 왜 숨어있는지 몰라 대화를 곱씹었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근육을 더듬던 탈혼검이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혈마대 안에서 자격을 갖추면, 혈마대를 빠져나가 다른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들었네.”
고개를 끄덕였다. 탈혼검이 속삭였다.
“그 시간이 끝나면 갈 곳은 있나? 내가 이래 봬도, 나찰종에서 암사대(巖沙隊)를 이끌고 있지. 자네가 원한다면, 내가 자리를 한 번 마련해보겠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달리 갈 곳이 있습니다.”
“어디지?”
“일마님에게 묶여있는 몸인지라…”
차마 천마를 언급할 수 없어 그 선에서 딱 그었다.
탈혼검이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와 일마님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꼬리를 늘린 그가 내 어깨를 덥석 잡았다.
“천혈인마와 사제지간인가?”
“그렇지는…않습니다만.”
“따로 모시는 스승이 있나?”
“없습…니다?”
“탈혼검이 궁금하지 않나?”
“탈혼검 말씀이십니까…?”
“그래! 탈혼검! 탈혼검이란 말이지. 끈질긴 자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검이네. 자네 같은 자에게는 아주 딱이야! 내가 평생에 자네 같은 독종은 본 적이 없네! 탈혼검이 자네를 위해 창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지!”
어깨를 잡은 손이 점점 더 조여졌다.
탈혼검 노하천의 눈빛 또한 더욱 강렬해졌다.
“자네라면…어쩌면 자네라면 그 끝을 볼 수 있을지 몰라!”
“스, 스승님?! 분명 대를 이을 자는 저밖에 없다고…”
“사제를 하나 둘 수 있는 거 아니겠느냐! 진명아! 물론 네가 사형이다! 네 밑에 애를 하나 더 들이는 것뿐이지!”
“사제…사제라면…그 지위로…이십구호와의 연결점을…”
극진명의 눈 또한 강렬해졌다.
마찬가지라 날 붙잡았다.
“삼십호. 탈혼검은 지고의 검입니다. 배우셔도 손해를 볼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 바로 그 말이네! 자네 같은 인재가 필요해! 저, 적어도…일마님과의 인연이 끊어진다면 나찰종으로 오지 않겠나?! 내가 항상 자네 자리를 비워두겠네!”
“이, 이거 좀 놓으세요…”
“삼십호. 삼십호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그 이름 높은 탈혼검의 직접 지도라니…세상에 이런 기회가 대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옳지! 진명아! 잘한다! 더 몰아붙여라! 내가 나찰종주님께는 잘 말씀 드리겠네! 자네 같은 자의 합류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지!”
“제, 제 말을 좀…!”
실랑이는 한참 지나서야 끝났다. 끝내 나를 설득하지 못한 노하천은 입맛은 다셨다.
“아쉽게 됐군.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스승으로 모시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마음에 담아 둔 스승이 있습니다.”
일마를 떠올렸다.
그녀와의 관계를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다른 자의 검을 배웠으니, 어찌 탈혼검까지 욕심을 내겠습니까. 분수에 맞지 않으니 거두어주시길 바랍니다.”
“…허어. 내가 조금 더 빨리 자네를 발견했어야 했는데.”
노하천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게까지 완고하다면 어쩔 수 없지. 대신 자네에게 사과를 따로 해야겠으니, 나중에 시간이 난다면 날 찾아오게.”
“그 말씀은…?”
“나찰종에 들어오라는 말이 아닐세. 내 나름대로 사과 선물을 준비해두지. 나는 말로만 사과를 하지 않아. 거기다…한때 검을 맞댔어도, 오해가 풀린 지금은 자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노하천이 웃었다.
“나는 자네 같은 사람이 좋네. 자네 같은 무인이 좋아. 구태여 사제지간을 맺지 않아도, 자네 같은 사람과 인연을 길게 이어나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지. 탈혼검 노하천. 그 이름이 필요하면 나를 부르게. 사과 선물과는 별개로, 자네를 위해 나서주지.”
“…감사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선물이었다. 나찰종의 탈혼검과의 친분이라니.
극진명 또한 마주 예를 취했다.
“삼십호. 재회할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공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나찰종에 방문하게 되면 이십구호도 꼭 같이…”
“그만하거라.”
“예. 스승님.”
노하천이 그의 제자를 끌고 나갔다. 나는 따로 이십구호를 찾아가 쓱 물었다.
극진명이라는 이름을 꺼내자 그녀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자꾸 찾아와서 논검이니 뭐니 하자고 떠드는 사람이에요. 저한테 베였던 주제에 뭐가 좋다고.”
“친한 게 아닙니까?”
“친하다고요? 저 남자 싫어한다니까요. 거기다가 극진명은 절 볼 때마다 자꾸 엄한 곳을 쳐다봐서 싫어요. 아주 성욕이 그득해서.”
이십구호가 에퉤퉤 하며 복면 밑으로 침을 뱉었다.
“출발은 오늘 밤에 하는 건가요?”
“시간이 늦어졌으니 그게 낫겠죠. 밤을 틈타 빠져나갈 생각입니다.”
“사마세가에 언질은 하고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한참 바쁠 때이니, 구태여 더 바쁘게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흐응…”
이십구호가 피식 웃었다.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그렇네요.”
밤이 깊어졌다. 나는 이십구호와 함께 방문을 나섰다.
바람 한 점 없는 조용한 밤이었다. 모두가 잠에 빠져있기라도 한 듯, 외부 또한 조용했다.
이십구호 뒤를 돌아 숙소를 쳐다보았다.
“은근 정이 들었는데 아쉽네요.”
“맞는 말입니다.”
한동안 숙소를 돌아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스쳐 지나가는 건물 사이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는 곳이 많았다.
“역시…아직 바쁜가 보군요.”
“모든 게 끝나면, 천악문의 재산이 사마세가로 옮겨질 거라 들었어요.”
“천악문의 문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또한 사혈대에 붙잡혀 조사당하고 있다 들었어요. 애초에 사혈대는 움직이는 일인(一人) 무력 기관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주변 문파는 사혈대의 부름에 즉시 응답해야 해요. 따르지 않으면 교주님에 대한 반역이나 마찬가지니까. 거기다가 단신의 무력 또한 한 문파를 쓸어버릴 정도로 높으니…천악문의 문주가 감히 도망칠 수가 없죠.”
이십구호가 손을 끌어모았다. 폴짝 뛰었다.
“아아…일마님은 역시 제 생각보다 더 멋졌어요. 비록 복면 아래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그 목소리나 위엄부터 남달랐잖아요!”
“…생각과 다르지 않았던 겁니까?”
“좀 더 현실감 있게 와닿았달까요. 삼십호의 뒤통수를 거침없이 내려치는 걸 보고 감동했어요. 그렇게까지 남자를 막 다루다니! 역시 제 우상이에요. 하아하아…반드시 친해져야…!”
“제가 뒤통수를 맞은 게 그리 좋습니까?”
“네. 좋아요. 아주 속이 시원하던데요?”
“……”
“저기요. 삐진 거 아니죠?”
“아닙니다.”
“삐졌네.”
“안 삐졌습니다.”
“그러지 말고 앞에 봐요.”
이십구호가 손을 들었다. 앞을 가리켰다.
“누가 기다리고 있네요.”
“……?”
사마세가의 대문.
문지기만이 지키고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누군가 서 있었다.
“삼십호.”
검은 무복 위로 피곤해 보이는 눈매가 깜빡인다. 벽에 기댄 장신.
멋쩍은 듯 달을 올려다보고 있던 사마세가의 가주가 가볍게 헛기침했다.
“옆집 똥개처럼 몰래 빠져나가는 건 어디서 배워처먹은 예의냐?”
“……”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이십구호가 복면 밑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아차차. 혼잣말을 한다는 게 사마세가의 가주 귀까지 들어갔을 줄이야.”
“…….”
“뭐요. 왜요.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한숨을 내쉬었다.
사마악의 앞에 섰다.
“바쁘신 거 같아 몰래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그게 예의냐?”
“배운 게 없는 터라, 예의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새끼.”
사마악이 내게 피식 웃었다. 들고 있던 것을 툭 건넸다.
“이건?”
“화주다. 가는 길이 심심하면 입이라도 축여라.”
“가는 길이 험해 술을 마시면 안 될 거 같습니다만.”
“그럼 기어라. 어차피 삐뚤빼뚤한 인생, 조금 절뚝거린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겠지.”
여전한 독설이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짐 속에 받은 상자를 넣었다.
“어디로 갈 거냐?”
“왔던 곳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래?”
사마악이 먼 산을 쳐다보았다. 몇 번 더 헛기침하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네 나이가 몇이라 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물여섯이 될 예정입니다.”
“쯧. 어린 새끼가.”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들었습니다만.”
“한 살이라도 연상은 연상이다. 씹어먹을 새끼야.”
사마악이 옆으로 비켜섰다.
“꺼져라.”
“…예.”
지나치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다소 씁쓸한 표정의 그에게 작게 웃었다.
“사마악. 하시는 일이 모두 잘 풀리기를 바랍니다.”
“흥. 네깟 놈이 걱정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풀릴 예정이다. 사마세가는 최고의 명문가가 될 것이고, 이전의 위세를 되찾을 거다. 그리고…”
사마악이 인상을 썼다.
“형님 보고 사마악이 뭐냐? 똑바로 불러라.”
“예?”
“호칭 똑바로 하라고 했다. 새끼야.”
“…형님?”
“그래. 그럼 이제 그만 꺼져라. 호위 무사 나부랭이야.”
사마악이 웃음을 터트렸다.
“밥 생각나면 와라. 딱히 갈 곳 없어도 오고. 사마세가는 은원을 잊지 않는다. 네가 사마세가 전체를 구했으니…”
처음 보는 표정.
부드러워진 입가가 작게나마 호를 그렸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를 불러라. 망할 아우야.”
가족으로서 대우해주겠다는 숨은 뜻.
나는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이십구호가 슬쩍 입을 열었다.
“저는요?”
“아직 안 갔냐?”
“아씨! 괜히 구해줬네!”
“농담이다. 너도 뭐…알아서 오던가.”
“온도가 다르잖아요?!”
“어쩌라고.”
둘을 지켜보다가 그만 웃고 말았다. 한참을 끅끅거리다 나는 짐 속에 넣었던 술을 꺼냈다.
뚜껑을 열었다. 지켜보는 사마악을 향해 보란 듯이 복면을 들어 3할을 비웠다.
맛이 뛰어났다. 일반적인 화주가 아니라는 것처럼 깊은 맛이 목구멍을 스쳐 지나갔다.
전에 먹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존중의 맛.
남은 것을 사마악에게 건넸다.
“한 잔 받으시죠. 형님.”
“…큭.”
사마악이 술을 받아들였다. 깔끔히 고개를 들어 남은 술을 마셨다.
“손윗사람이 마시는 게 먼저다. 멍청한 놈아.”
“배운 적이 없는지라.”
“하여간. 가르쳐야 하는 게 산더미 같으니…쯧. 어이. 계집.”
“저 남자가 입 댄 거 안 마셔요.”
“그럼 머리에라도 뿌리던가.”
“…이번만이에요. 에휴.”
한숨을 내쉰 이십구호가 살짝 복면을 들어 술병을 깔끔하게 비웠다. 남은 병을 챙긴 사마악이 턱짓했다.
“이십구호. 삼십호. 진짜 이름이 뭐냐?”
시선을 교환했다. 나는 밝혀야 할지, 숨겨야 할지를 잠깐 고민했다.
난감한 듯한 시선 속에서 사마악이 혀를 찼다.
“멍청한 새끼야. 내가 네놈들 이름을 어디서 말할 사람처럼 보이냐? 그럴 가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말 좀 예쁘게 못 해요?”
“내가? 뭐 하러? 평생을 이리 살아왔는데 한순간에 바뀌는 게 이상한 거다. 가면을 쓰고 너희를 대한다는 거나 다름없지. 가짜 얼굴로 웃으며 대해주길 원한다면 그리 해주마.”
“말이나 못 하면…”
이십구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시선을 의식하면 입을 열었다.
“백매(白梅)에요.”
“너는?”
“……”
…여기서라면.
여기서라면 괜찮지 않을까.
결국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적운(赤雲)입니다.”
“적운? 붉은 구름이라. 이상한 놈답게 이상한 이름이군.”
“저기요. 남 이름 가지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진짜 예의 없는 거라고요.”
“네가 저놈 마누라라도 되냐?”
“뭐, 뭐라고요?! 하! 나참! 진짜 어이가 없어서…!”
“부정은 안 하는군.”
“뭐, 뭐라는 거예요! 하! 나참! 정말 어이가 없어서!”
사마악이 빈 술병을 흔들었다.
“적운. 백매. 기억했다. 이 술병은 내 방 가장 높은 곳에 놓일 거다. 내가 살아있는 한 치워질 리 없겠지.”
“……”
“용돈 필요하면 말해라. 적당히 보내줄 테니.”
사마악은 그 말을 마치고 뒤돌았다. 몇 걸음 멀어지다가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먼 길 안 나간다.”
깔끔한 인사말이었다.
그렇기에 나 또한 화답했다.
“즐거웠습니다. 형님.”
“…흥.”
사마악이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더는 돌아보지 않고.
“넌 내가 고용했던 호위 무사 중 제일 바보 같은 녀석이다. 본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내지.”
“…….”
“하지만 뭐.”
설렁설렁 흔들리는 손이 멀어졌다.
약간의 어색함 속에.
“나쁘지 않았다. 적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