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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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십구호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창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이 따가웠다.

슬쩍 몸을 옮겼다. 몸이 쑤시지 않은 곳이 없어 더 누워있을까—하고 생각하다가 결국 슬그머니 일어섰다.

이른 아침.

나뭇잎 끝에 이슬이 맺혀 있다. 간단히 세안을 마친 이십구호는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어린 하인과 마주쳤다.

이제는 통성명도 마쳤다. 늦었지만 그 이름이 ‘조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 대인! 아직 움직이시면 안 돼요!”

“배고파요.”

“자리에 가져다 드릴게요! 얼른 돌아가세요! 병자는 쉬어야 해요!”

꾹꾹 등을 미는 손길이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린 하인이 떠나고 나서는 슬그머니 다시 방을 나섰다.

가벼운 산보. 햇빛 자체는 무척 기분 좋았다. 살짝 차가운 바람은 어떤가.

방 안에만 갇혀 있던 몸을 일깨우는 거 같다. 무심코 멀쩡한 팔로 검을 더듬던 그녀는 쓰게 웃었다.

습관이네요.

나참.

바보가 옮아버린 건지.

방으로 돌아가자 어린 하인이 식사를 가져온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잔소리가 날아왔다.

“대, 대인!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의원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산책 정도는 괜찮아요. 그런데 죽밖에 없어요?”

고기가 먹고 싶다. 생고기 말고 구운 고기가.

어린 하인이 매몰차게 고개를 저었다.

“의원님이 당분간은 육류를 제한하라고 하셨어요. 곡기만 드셔야 해요.”

“…끄응.”

간단히 식사를 마친 뒤에는 데운 수건을 이용해 몸을 닦았다. 여전히 상처는 쓰라렸지만, 아예 움직일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찾아온 의원이 감탄했다.

“구천혈마공이라는 건 정말 특이한 무공이군. 회복이 빨라.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진 건지, 아니면 부가적인 것인지…다만 그만큼 기맥이 불안정하군. 당분간은 검에 손을 대지 말게.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들 수 있으니.”

“주의할게요.”

“말이 잘 통해서 좋군. 늘 먹던 환단이네.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묘시(卯時)에 복용하게.”

침을 몇 대 놓은 뒤 돌아가려는 의원을 붙잡았다.

“‘저쪽’은 괜찮나요?”

“흐음…담당 의원이 달라서 말이지. 잘 모르겠군.”

의원이 떠났다. 이십구호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사는 꼬박꼬박 나온다. 수발을 들어주는 사람 또한 있다.

생각지도 못한 낙원.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삼십호의 상태를 보고 싶다. 열흘이 지난 지금까지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를.

“소저. 들어가면 안 됩니다.”

하지만 들어가려고 할 때마다 번번이 막혔다. 안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들의 표정 또한 어두웠다.

차도가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믿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그의 모습은 시체에 가까웠으니.

걸레짝이 된 몸. 성한 곳이 단 한 곳도 없던 차가운 피부.

긴 시간 동안 홀로 탈혼검을 붙잡고 있었던 그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꺼질듯한 숨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을…살아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찾아온 극진명이 말했다.

“소저. 그는 무사할 겁니다. 제 스승님이 말씀하시길, 목숨은 일단 건졌다고 하더군요. 치료 또한 호전을 보이고 있다 들었습니다.”

“…목숨을 건진 걸로는 부족해요.”

그가 검을 휘두를 때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보지 않았던가.

이십구호가 생각하기엔 삼십호와 검은 서로 떨어트려 놓을 수 없는 형제와 같았다.

목숨이 붙어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에게서 검을 떼어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어떻게든 돕고 싶은데…

“…소저께서는 그를 동료 이상으로 생각하시는군요.”

“네, 네?! 무슨 헛소리에요?! 그냥 딱 동료 정도거든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좋겠군요.”

극진명이 웃었다.

“도울 방법이 없는지 스승님께 따로 여쭈어보겠습니다. 저희 또한 계략에 놀아났다고 할지언정, 잘못을 저지른 건 변함이 없으니까요.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소저.”

“됐어요. 본교 내부에서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인가요. 극진명.”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소저. 아니…그래주시면 감사하겠군요.”

“그건 좀. 따지고 보면 그쪽이랑 제가 친하게 지내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요? 거리는 둬요. 우리.”

“……”

발만 동동 굴리던 이십구호가 삼십호가 있는 방을 열흘 하고도 하루째 지켜보던 날의 밤.

새벽에 갑작스레 사람들이 그의 방으로 몰려갔다.

“무, 무슨 일이에요?!”

“그가 깨어났습니다!”

“……!”

이십구호는 앞뒤 가리지 않고 뛰었다.

“…조용…! 전부…물러…”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끝을 움직였다.

몸이 이상했다. 말을 듣지 않았다. 눈에 무언가 비치기도 했다.

귀가 멍했다.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천겁이 멈췄다.

“…들리…말이…해보…”

누군가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앞에 있는 빛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여긴 어디지.

분명 나는…탈혼검과…

“…크윽?!”

갑작스레 감각이 돌아왔다. 천겁이 미약한 비명을 내질렀다.

움직이기 시작한 손끝. 그 안에 무언가 있다. 혈관과 내부. 시려서 미칠 것만 같은 한기의 연속.

몸이 경련했다. 동시에 입속에서 뭔가 뛰쳐나왔다.

“우웨에에에엑!!!”

피.

썩어버린 피가 입 밖으로 줄줄 새어 나온다.

“꺄아….아…!”

“뭔…대답…!”

“물러…서십…!”

여전히 띄엄띄엄 들려오는 목소리. 몸을 짓누르는 수많은 손에 나는 옆을 더듬었다.

여긴 어디지.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너희는 누구지? 내게 뭘 하려는 거냐.

“비…켜…!”

뿌리친다. 한순간 내 몸에 손을 대고 있던 사람이 쓰러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벽에 기대 쓰러지려는 몸을 바로 세웠다.

앞이 흐릿했다. 여전히 잘 보이지 않았다.

싸워야 한다.

싸워서 이겨야 해. 늦지 않았을 거야.

손을 움직여. 뻗어.

삶의 마지막까지 투쟁을…!

“그만.”

뻗은 주먹이 막혔다.

누군가 날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꼬맹아.”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죽을래? 진짜 파묻어줘? 응? 적당히 해. 너 때문에 내가 며칠째 철야 중인지 아니?”

“…….?”

“싸움은 끝났으니까 얌전히 있어. 하. 진짜. 귀찮은 일에 휘말려서는…”

눈을 깜빡였다.

썩은 피를 게워낸 몸에서 천겁이 천천히 움직였다. 뼈에 내려앉은 한기는 그대로이지만,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들리는 목소리 또한 선명해졌다.

“내가 아니었으면 넌 거기서 죽었어. 그뿐이야? 나는 지금 네 은인이나 다름없다고. 그러니까 잘해. 이 모든 건 빚이니까.”

엇나갔던 초점이 바로 잡혔다. 누군가에게 안겨있는지 나는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자주색 머리카락. 마지막으로 떠올린 모습보다 한참은 헝클어져 있는 피곤한 안색.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그녀가 내뱉었던 말들을.

“…사혈…대…입니까…? ”

“그래. 사혈대다. 꼬맹아.”

코끝이 콕하고 꼬집혔다.

“네게 있어 아득히 높은 선배지. 그러니까 얌전히 있으렴? 한 번 더 사고 치면 밖에 내던질 거야.”

“…….”

한순간 돌아온 색채 속에서 나는 내가 건물 안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날 놓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사람으로 가득 차 있는 방. 언뜻 보이는 사마악과 이십구호의 모습.

모두가 날 바라보고 있었기에 물었다.

“…이겼습니까?”

“…이 망할 새끼.”

사마악이 웃었다.

“그래. 이겼다. 새끼야. 네 덕분에.”

그 한 마디로 몸에 긴장이 풀렸다. 주르륵 벽에 미끄러져 한숨을 내쉬었다.

천겁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 속에서 나는 몸을 옥죄던 고통이 다시 돌아온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반가웠다.

여전히 검을 들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기에.

이야기를 들었다. 다소 풀기 복잡해 보였던 이야기는 사혈대 ‘묘예린’의 등장으로 모두 풀렸다고 들었다.

“천악문은 현재 조사를 받고 있다. 헛소문을 낸 것과 의도적으로 사마세가를 방해한 점, 죽은 추의경과 같이 사마세가를 잡아먹으려 한 점이 모두 드러나고 있지. 상황 자체를 사혈대가 통제하고 있기에 탈혼검도, 그의 제자 극진명도 전부 여기에 있다. 외진 건물에 구금되어 있지. 물론 어디까지나 형식상이지만.”

사마악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혈대란 이름이 역시 무겁더군. 한 번 출두하자마자 여기저기 다 뒤집히는 꼴이라니.”

“어떻게 부르신 겁니까?”

“돈이다. 사마세가의 1년 예산을 냈지. 도박이나 다름없었으나, 다행히 제시간에 맞춰서 도착했더군. 저년이 가지고 온 출입 기록의 영향이기도 했지.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으니, 사혈대가 직접 온 것이다. 전서구를 사방으로 날린 보람이 있었지. 이 마을 근처의 모든 지부는 다 뒤졌다.”

“년년 거리지 마실래요?”

이십구호의 상태는 이상했다. 한쪽 눈은 붕대로 가려진 것은 물론, 부목을 덧댄 왼팔은 움직임에 맞춰 덜렁거렸다.

“이십구호. 그 상처는…”

“영광의 상처에요. 그거 알아요? 저 극진명한테 이겼어요. 탈혼검의 제자를 완전 정면에서 파바박—하고 부러트렸다니까요?! 어때요. 다시 보이죠?”

“사혈대가 발견한 시점에는 땅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더군.”

“조용히 안 해요? 아무튼, 부상 걱정은 할 필요 없어요. 모두 깔끔히 낫는다고 들었어요.”

사마세가의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내 몸 상태는 다소 이상했다.

다시 움츠러든 천겁. 단전에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섞여 있기도 했다.

얼음 조각.

빙백설이 남긴 영단을 섭취한 탓일까.

내력을 운용해봤지만 제대로 운용되지 않았다. 혈도가 모두 얼어붙어 버린 것처럼 오한이 느껴지기도 했다.

설마…

몸이 망가져 버린 걸까.

찾아간 사혈대의 묘예린은 코웃음을 쳤다.

“헛소리하지 마. 내가 널 안 망가트리려고 얼마나 노력한 지 아니?”

“멀쩡하다는 겁니까?”

“구천혈마공이나 꾸준히 돌리렴. 대주님께서 오기 전까지.”

“대주님이라면…”

“천혈인마. 네 상관을 말하는 거야. 있었던 일을 보고하니, 직접 오신다고 하셨지. 네가 어지간히 소중하긴 한가 봐. 천혈인마가 사람 때문에 왔다 갔다 한다니…본교 내의 그 누가 믿을까? 아무튼, 나 바빠. 너 때문에 밤까지 샜는데 이제는 일까지 하는 중이라고. 찾아오지 말고 얌전히 방에 박혀 있으렴.”

일마.

그녀는 내가 정신을 차린 뒤, 이레 뒤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성큼 장원을 걸어와 손을 들었다.

내 뒤통수를 그대로 후려쳤다.

“이 새끼는 하여간 사람 말을 더럽게 안 들어!”

뒤통수가 아파서 문질렀다.

탈혼검을 상대로 버텼다고 칭찬이라도 살짝 섞어줄 줄 알았는데…

다짜고짜 혼을 내다니.

“…저는 일을 열심히 한 죄밖에 없습니다.”

“또또! 볼 빵빵해진 거 봐라! 네놈이 그럴 상황이냐?!”

“세상에…진짜 일마님…?! 조, 종이?! 종이 있는 사람 없어요?! 서명이라도 하나 받고 싶은데…!”

일마가 눈을 반짝이는 이십구호를 툭 밀쳤다. 내 목덜미를 잡아챘다.

“묘예린. 외부 인원 전부 통제해라. 내가 있는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살펴보고 뜯어 고칠 생각이다. 내가 먹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일마가 으르렁거렸다.

“그걸 기어코 먹어? 다 끝나면 뒈질 줄 알아라.”

“…그러면 고치는 의미가 없잖습니까.”

괜스레 볼멘소리 한 번 내뱉었다가 뒤통수만 한 대 더 맞았다.

이십구호가 분위기를 감지하고 종이를 쓱 품에 넣었다.

“삼십호는 은근 매를 버는 유형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