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8
모든 영민들이 떠나고 텅 빈 것이 나름 없게 된 영지. 두 마법사는 거의 모든 시간을 지하실에 틀어박혀 모리아티 머신의 사용법을 연구하며 보냈다.
만약 싸움이 벌어지면 쓸 수 있는 무기나 스크롤은 모두 준비해 놨다. 영지에는 정재가 유지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어막이 둘러져 있고, 위협이 닥쳐올 시 알려줄 수 있는 경보 시스템도 완벽하다.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준비했지만, 초조한 마음은 달랠 길이 없기에. 대마법사는 오늘도 모리아티 머신과 그 안에 담긴 성력, 드라큘라를 잡기 위한 어떤 단서가 되지 않을지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이 성력 말이에요, 직접 다루기 힘드신 거예요?”
제니스가 공중에 떠있는 동그란 성력 구슬을 손으로 툭 두드리며 물었다.
“네, 십자가 목걸이 같은 마도구가 있다면 나도 그 힘을 아주 못 다루진 않겠지만, 빛의 마나에 비해서는 좀 낯설어. 아마 이 세상에서 그 힘을 온전히 다룰 수 있는 건 성검을 직접 휘두르는 발터밖에 없을걸.”
“그런가요? 하지만 전통적으로 이 힘은 이계에서 온 사람들이 제대로 다루는 것이 관례였는데 말이죠.”
“뭐, 개인차가 있겠지. 그렇게 따지면 선대 마왕이라는 자도 성력을 잘 다뤘어야 정상이고…”
“실제로 그랬을 수도 있죠. 이 기계를 만든 사람이라면서요. 성력을 저장하고, 출력까지 할 수 있는 장치요. 마나에 대한 높은 이해가 없으면 불가능한—”
그리고 바로 그 때였다. 쿵, 하는 거대한 굉음과 함께 지하실 전체가 진동했다. 정재와 제니스는 동시에 그 자리에 얼어붙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진인가?”
“아뇨, 땅이 흔들린 게 아니라 저 위에서…”
그리고 또다시, 쿵하는 소리. 이번엔 멍청히 서서 멀뚱거리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두 마법사가 서둘러 발을 움직여 지하실 밖으로 나가는 계단 쪽으로 발을 디딘 그 순간이었다.
“잠시만, 멈춰, 제니스!”
뒤늦게 발동한 경보 마법의 정보를 습득한 정재가 계단 위로 뛰어올라 가려던 제니스를 황급히 저지했다. 제니스가 조급한 표정으로 정재를 돌아보며 물었다.
“영지가 공격받고 있어요. 왜 말리세요?”
“방금 두 번째 공격으로 방벽이 이미 관통당했어. 지금 밖에 나가면 맞아 죽어!”
“그럼 여기가 만히 남아서 뭘 어쩌자는—”
검은 번개가 남작성의 지붕 위로 내리쳤다. 어린아이의 주먹이 모래성을 부수듯이, 거대한 쇠망치가 작은 과자를 으깨듯이. 내리찍힌 번개 한 방에 성의 지붕이 조각나고 벽이 허물어졌다. 창문이 녹아내리고 장식들이 불타 사라졌다.
거대한 지진 폭탄에 맞은 히틀러의 별장처럼, 강력한 벙커버스터에 맞은 반군의 기지처럼 강력한 번개에 맞은 구역에는 그곳에 성이라는 것이 존재했다는 흔적 하나 남지 않고 지형마저 산사태처럼 뒤집어졌다.
정재의 판단은 옳았다. 남작성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이 소중한 기계를 지키기 위해 설계된 지하실뿐.
방금 전 땅을 향해 내리찍힌 일격은 성 전체를 증발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하실을 보호하고 있던 강력한 보호 마법마저 산산조각냈다. 지하실 자체는 온전했지만, 천장에는 커다란 구멍이 남았다. 정재와 제니스는 지하실 천장에 난 구멍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떡 벌렸다.
밤하늘 위에 일전에 보았던 거대한 검은 용이 날개를 펄럭이며 붉은 두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방금 전 쏘았던 강력한 번개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려주듯, 용의 입에서는 검은 전류가 아직도 파지직거리며 남아있었다. 용의 모습을 한 드라큘라와 두 마법사들의 눈이 마주쳤다.
“거기 숨어있었군.”
분명 수십 미터는 떨어져 있는 것임에 분명함에도, 그의 목소리는 두 사람의 귀에 바로 들어와 꽂히듯이 선명하게 울려왔다. 이 지하실의 보호막이 한 번은 두 사람을 지켜주었지만, 다음 공격에서는 지켜줄 수 없다.
정재가 천장을 통해 지하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염력을 써서 자신의 몸을 붕띄웠다. 제니스도 동시에 날개를 활짝 피고 하늘로 날아오르며 천장의 구멍을 통과했다.
드라큘라는 그들이 있는 위치에 부담을 느꼈는지 입에서 번개를 파직거리기만 할 뿐 추가적인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정재는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모리아티 머신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받았나?”
드라큘라는 답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정재를 노려보기만 했다. 키만 50미터는 되는 괴수가 하늘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이 무섭긴 했지만, 기에서 눌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정재는 계속해서 꿋꿋이 드라큘라와 눈싸움을 벌였다.
날개를 펼치고 구멍 밖으로 빠져나온 제니스가 영지를 흘끔 돌아보고는 충격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교수님, 이건…”
“나도 봤어. 남은 사람은 없잖아. 너무 신경 쓰지 말자고.”
하지만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있겠는가. 영지의 꼬라지는 오우거들이 전투망치로 모조리 다 때려부수고 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만약 키가 1km 쯤 되는 달 토끼가 절구통 안에 해리엇 영지를 넣고 방망이로 마구 찧어버린다면 지금 영지의 모습을 간신히 재현해낼 수 있을 것이다. 영지의 모습은 그 정도로 처참했다. 방어막을 부수기 위해 쏘아진 드라큘라의 번개가 3천 명의 인구가 살던 마을을 진흙탕도, 평지도 아닌 이상한 쓰레기장으로 뒤바꿔놓았다.
영지 전체에서 방금 전 번개 두 방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을 보이는 공간은 멀찍이 떨어진 해변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곳은 원래 아무것도 없던 곳이라 그다지 위안 삼을 만한 사실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게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일까요?”
제니스가 공포와 경외가 동시에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재가 상대의 힘을 재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강력하긴 하네. 하지만, 이것뿐이라면 나도 충분히 할 수 있어.”
“물론 할 수 있으시겠죠… 하지만…”
“물러서, 제니스. 고작 힘 자랑을 하러 온 거라면, 자랑할 상대가 틀렸다는 걸 보여주지.”
정재가 자신의 몸에 가속 마법을 걸고 로켓처럼 하늘로 튀어올랐다. 제니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정재가 드라큘라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쳐다보았다.
“저, 저… 흥분하지 마세요! 정말로 영지일만 얽히면 정신을 못 차리시고…”
정재가 정말로 진지하게 격노할 정도로 중요시하는 것은 주로 인명에 관련된 문제이다. 재산 피해에까지 일일히 신경을 쓰며 죄책감을 가지고, 또 분개하며 살면서는 이전란의 시대를 살아갈 수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의 생명에 관련된 문제는 가볍게 여길 수 없고, 여겨서도 안 된다.
정재에게 있어 영지는 그 자체로도 소중한 거다. 그렇지만 누군가 쳐들어와 사람도 없는 영지를 뒤엎어봐야 명절날 찾아온 조카가 300만원짜리 밀레니엄팔콘 레고를 부서뜨린 것 정도의 짜증밖에 유발하지 못한다. 물론 그것도 충분히 짜증나는 일이지만, 망치를 집어들고 조카의 머리통을 내리칠 만큼 흥분할 만한 일도 아니다.
그런데 드라큘라는, 하늘에서 그를 비웃듯이 내려다보며 입에 번개를 머금고 있는 저 흑룡은 유일하게 정재의 영지에 쳐들어와 영민들을 직접 살해한 악당이다. 그 원한은 정재의 마음속 깊숙히 남아있고, 겨우 다스렸다고 생각했던 격정이 방금 전 저 녀석의 공격으로 완전히 불이 붙어버렸다.
하늘로 날아가던 정재가 양손에 ‘별의 섬광’의 마법진을 꺼내들고 드라큘라를 향해 겨냥했다.
“가볍게 갈 생각은 없다.”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두 갈래의 마법 광선. 각자가 모두 마탑 최고의 마법사 열명을 모아와도 함부로 재현하기 힘든 파괴력을 지닌 공격이다.
두 개의 광선이 공중에 떠있던 드래곤에게 직격한 순간, 정재는 폭발의 여파에서 몸을 피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지상을 향해 하강했다. 저 아래에서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제니스도 공기가 떨리는 듯한 충격에 날개로 몸을 감추고 눈을 질끈 감았다.
공격은 효과가 있었다. 광선에 맞고 꼬리를 밟힌 도마뱀 같은 소리를 내며 울부짖던 드라큘라는 너무나도 강력한 타격에 혼란에 빠진 듯 눈을 껌뻑이다가 서서히 지상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그 그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대한 괴수였으므로 그대로 지면과 추락했다면 그것만으로도 또 다른 지진을 일으켰겠지만, 그는 지상에 거꾸로 내리꽂히기 전 간신히 균형을 잡고 안정적인 자세로 바닥에 착지하는 데 성공했다.
정재의 공격 역시 어지간한 마을 하나 정도는 분쇄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진 공격이었지만, 저 괴물 같은 덩치와 내구성을 상대로는 치명상도 입히지 못했다.
“그, 알고는 있었지만 진짜 엄청나네요.”
“엄청난 껍데기야. 이 정도 공격으로도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힐 수 없을 정도면…”
“아니, 상대도 상대지만, 일단 교수님이요. 방금 그거 엄청났어요.”
“그럼 뭐해, 흠집도 못 낸 것 같은데.”
“흠집은 났어요, 보세요.”
제니스가 지팡이 끝을 들어 폐허가 된 영지 한가운데에서 주춤거리는 드라큘라를 가리켰다. 겉으로 보기엔 큰 상처는 없어 보였지만, 이 거대한 검은 괴수는 어딘가 뼈가 하나 부러진 동물처럼 몸을 움찔거리며 제대로 행동을 하지 못했다. 정재가 그래도 자신의 공격이 아주 헛되지는 않았다는 생각에 만족스럽단 표정을 지으며 땅에 착지했다.
“성…은 이제 없고, 지하실 중심으로 빙빙 돌면서 대치하자. 녀석은 지하실의 방어 마법이 파괴된 것을 보고 주저했어. 분명히 안에 있는 물건을 망가뜨리지 말고 확보하란 명령을 받은 거야.”
“그럼 차라리 저걸 아주 꺼내와서 인질극을 벌이는 것도…”
제니스가 정재의 말에 아주 한술 더 뜬 책략을 내놓았다. 정재는 제니스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정말로 파괴되면 어쩌려고? 상대가 저 물건을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조심한다는 건, 정말로 망가지는 경우 주체하지 못하고 폭주할 수도 있다는 거야. 목숨 걸고 지킬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일부로 망가뜨리려고 할 필요까진 없지.”
“저도 알아요. 한번 농담해본 거예요. 게다가… 뭔가 아직은 저 물건이 쓰일 곳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 그러면 일단은 내버려 두자고.”
제니스는 발터와 더불어 이 세상에 오직 단둘 밖에 없는 진짜 예언자다. 미래 예지의 힘이 담긴 마도구는 그 사용자의 정신에게도 강력한 영향을 끼쳐, 그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때에 조차 직감의 형태를 통해 미래를 예견해주는 경우도 있다.
원래도 육감이라는 건 무시할 것이 못되지만, 제니스의 직감이라면 더더욱 무시해서는 안 된다.
잠시별의 섬광에 얻어맞았던 늑골 부분에 손을 대고 있던 드라큘라는 부러졌던 곳을 대충 마법으로 봉합하는 데 성공한 듯했다. 드래곤이 다시 정재와 제니스 쪽으로 관심을 돌렸고, 역시나 두 사람이 지하실 구멍 근처에서 서 전투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저했다.
정재가 드라큐라를 향해도 발하듯 외쳤다.
“이 안에 있는 게 그렇게 소중한 물건인가? 너에게? 아니면 마왕에게? 어느 쪽이든 우리 모두를 박살내지 않고는 가져갈 수 없을 테니 얌전히 포기하고 물러가라!”
“이제 내게는… 물러선다는 방법이 없다.”
거룡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정재의 첫 번째 일격에 얻어맞은 상처를 어떻게든 봉합했지만, 날개를 휘두르며 하늘을 날 수 있을 정도의 치료는 아니었다.
현대의 아파트와 비교해도 결코 작지 않은 덩치였던 탓에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기만 해도 땅이 쿵쿵 울려대는 진동이 일었다. 가만히 괴수가 다가오는 것을 쳐다보던 정재가 가볍게 중얼거렸다.
“옥시전 디스트로이어만 쓸 수 있다면 한 방일 텐데…”
“그거จริง으로 지금 쓸 수 있는 무기나 마법 같은 거예요?”
“아니, 실제로 존재하는 물건이 아냐.”
“그럼 그냥 상상 속으로만 해주세요. 괜히 사람 기대하게 만들지 말고.”
물론 진짜로 ‘한 방’으로 이 상황을 끝내버릴 수 있는 마법이 아주 없지는 않다. 하지만 당연히 지금 상황에서 그 마법은 선택지에 들어가지 않는다. 정재로서는 지금 상황이 자신이 목숨을 바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상황인지도 확신할 수 없고, 당연한 말이지만 ‘맨하탄’ 수준의 대규모 폭발이 벌어진다면 제니스가 휘말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결국 좀 더 ‘온건한’ 방법으로 어떻게든 사태를 정리해야만 한다. 제니스가 허리춤에서 에라메니아의 검을 뽑아들고 날개를 펼쳐 전투 자세를 취했다. 정재는 양손에 방어 마법진을 펼친 채로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괜찮아. 이 위치를 지키고 있는 한 상대도 너무 격렬한 공격은 못해. 이 고지면 지키고 있으면 적어도 해가 뜰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거고, 그러면 유리한 반전을 노릴 수 있겠지.”
“그 해가 뜰 때까지 버틴다는 전략, 성공한 적은 있었나…?”
“없지. 하지만 존재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는 거잖아.”
“그 말씀은 맞죠.”
설사 실제로 밤새 적의 공격을 버텨내어 해가 뜰 때까지 싸우는 일이 없다 하더라도, ‘해가 뜨면 상대의 힘이 약해진다’라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 사실 때문에 적에게는 사실상의 시간 제한이 걸리는 것과 다름없고, 상대의 싸움을 조급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그 효과가 드러나기 시작했는지, 드라큘라는 함부로 두 사람을 공격하지 못하면서도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어 천천히 걸음을 옮겨 계속해 해리엇 남작성이 있던 위치로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