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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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구호가 말했다.

“짐을 챙겨. 삼십호. 우리 할 일을 누군가 대신해주었어. 우리는 이대로 날짜를 맞춰 떠나면 돼.”

그녀의 말이 맞았다. 손을 대지도 않고 코를 풀었다.

내키지 않았던 마음을 누군가 눈치라도 챈 듯, 대신 일을 저질러주었다.

분명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구태여 모험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없는 짐을 꾸리고, 벽에 등을 기댔다.

이대로 밤이 되면 객잔을 빠져나가면 된다. 그다음은 원래의 계획대로 마곡으로 가면 되겠지.

…그거면.

그거면 될 뿐이다.

“이십구호.”

“응?”

“맹천에게서 받은 게 있습니다.”

나는 품에서 목각함을 꺼냈다. 이십구호가 얼굴을 찡그렸다.

“…영단? 그걸 네게 줬다고?”

“네. 맞습니다.”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보여주는 거야?”

“이십구호와 같이 해낸 첫 임무이지 않습니까.”

나는 영단을 반으로 쪼갰다.

“혼자 먹고 싶지 않았습니다.”

“…너.”

이십구호가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진짜 이상하네. 혼자 먹어도 난 몰랐을 거야.”

“이십구호에게는 딱히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쯧.”

그녀가 사양 없이 영단 반쪽을 가져갔다. 나 또한 남은 반쪽을 먹고 운기를 시작했다.

10년 공력이 담긴 영단은 반으로 쪼개져 5년 공력밖에 더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로도 만족스러웠다.

내 안의 탁한 마기에 기운이 더해졌다. 질은 떨어지나 양은 더욱 많아진 내공 덩어리.

검고 붉은 구가 더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소주천을 마쳤다. 바깥의 시간은 그리 많이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적당한 바람. 지평선에 걸린 햇빛.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석양의 냄새.

“…후우.”

때를 맞춰 영단을 소화해낸 이십구호가 벽에 등을 기댔다.

“안에서 뭘 했길래 맹천이 너한테 영단을 준 거야?”

“보고한 대로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었을 뿐입니다.”

“그게 끝이야?”

“끝입니다.”

“고작 닷새 동안 이야기 상대를 해준 대가로 영단 하나를 줬다고? 이상한 사람이네.”

“그러게 말입니다.”

나는 조소했다.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로. 마지막으로 본 날에는 사고뭉치 아들이 드디어 치료될 거라며 크게 기뻐하더군요.”

“…….”

“사고라. 흑천부의 문주는 확실히 심마에 걸린 게 확실했습니다. 손끝은 떨리고, 도끼를 잡은 손에는 힘이 없었죠. 하지만…”

붉다.

창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붉어.

나는 그 속으로 슬그머니 발을 내밀었다. 발끝이 붉게 물들었다.

“사고로 죽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고수였으니까요.”

“만사신의의 제자가 오늘 온다고 하지 않았어? 기묘한 우연이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

이십구호가 내게 기어 왔다. 얼굴을 불쑥 들이댔다.

“무슨 생각해?”

“…별거 아닌 생각입니다.”

“야. 네 입으로 말했지.”

“무엇을…”

“내게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다고.”

“…….”

생각하고 있던 건 정말 별거 아닌 말들의 덩어리였다.

“흑천부의 문주가 제게서 잃어버린 둘째 아들의 그림자를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냥꾼이 아닌 친구로서 흑천부를 또 방문해달라고 하더군요.”

“또 있어?”

“…그리고.”

나는 말끝을 곱씹었다.

「고맙네. 내 이야기를 들어주어서. 흑천부의 기둥이 나라면, 잠시나마 이 나를 지탱해준 건 자네야.」

“그…리고…”

나는 말끝을 곱씹었다. 그걸로는 모자라 입술을 깨물었다.

“…이십구호. 저는 이 영단을 받은 순간, 흑천부의 문주를 죽일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손으로. 그래서 전날까지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

“……”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살짝 기쁘기도 했습니다. 제 손끝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하기도 했습니다.”

“…….”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의문만이 남더군요. 혈마대로서 가지면 안 될 의문. 개로서 품으면 안 될 생각.”

…누가.

누가 내 친우를 죽였는가.

“흑천부의 문주는 아들을 아끼던 아버지였습니다. 한 사람의 무인이 아닌, 그저 가족을 지키고자 했던 나이 든 남자에 불과했습니다.”

“…….”

“무인은 검으로 죽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검을 든 이상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감내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흑천부의 문주는 무인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도끼를 오랫동안 내려놓은, 사그라지는 꽃에 불과했습니다.”

“…너.”

“그래서 알고 싶어졌습니다.”

발끝을 물들인 석양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 모든 것을 뒤덮는 건 어둠뿐.

“그를 죽인 게 누구인지.”

이십구호가 허탈하게 웃었다. 얼굴을 쓸어내렸다.

“넌 정말…신교랑 안 어울리는 인간이네. 대체 왜 그렇게 사는 거야?”

“……”

“신교의 사람은 자신의 목숨 하나를 챙기기에 급급해. 하루의 굶주림을 면할 수 있다면 주저 없이 검 끝에 피를 묻히지. 이곳은 척박하고,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사람의 등을 처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게 신교야. 혈마대 안이라고 다르지 않아. 착한 이는 일찍 죽고, 선행을 베푸는 이는 그보다 더 일찍 죽지.”

성자명이 떠올랐다.

나는 말을 아꼈다.

“이 모든 건…그러니까…네가 지금 마음먹은 건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야.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어. 우리는 손을 대지도 않고 코를 풀었다고. 잘 풀렸잖아? 그렇지 않아?”

“…….”

“잘 풀린 일은 그대로 내버려 두면 될 뿐이야. 그걸 굳이 들쑤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누구의 손에 죽었든, 그게 무슨 소용이야? 흑천부의 문주가 죽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거잖아?”

“…맞…습니다.”

“나는 혈마대야. 너도 혈마대잖아. 신교의 인물이잖아. 살기 위해 남의 목에 검을 박아넣는 무인이잖아.”

이십구호가 나를 밀쳤다.

“…네가 지금 하는 건, 그저 위선일 뿐이라고.”

그 말이 맞다.

이건 위선이다.

애초에 남을 죽이러 온 자가 복수심을 품는다는 게 말이 될까.

나는 내 위에 올라탄 이십구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 인피면구 뒤의 얼굴까지는 알 수 없다.

“…신교의 무인이라면, 교인답게 행동해. 뜯어먹어. 살기 위해서라면…네 자식조차 버리라고.”

“…….”

나는 그녀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부모의 편지도 무시하고, 죽어버린 여동생마저 외면하지 않았던가.

그런 내가 누군가를 품을 수 있다는 게 말이 안 될 수도 있다. 목표였던 자에게 연민을 느끼다니. 그것이야말로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게 놓아지지 않는다.

“…오늘이 끝나면 저는 혈마대의 살수가 되었을 겁니다.”

“…….”

“하지만 오늘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십구호.”

갈 길을 정했다. 말을 내뱉으면서 감정을 갈무리했다.

이십구호의 말이 맞다. 나는 혈마대다. 동시에 천마의 개다.

시키면 물고.

감정 없이 일을 해결하면 될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쌓아 올린 검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시키는 대로만 해서 얻는 검에 의미가 있을까.

내가 나로서…

나의 방식으로서 천마와 같은 자리를 꿈꾸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입 안에 씁쓸한 영단의 맛이 남아 있었다.

「내 둘째 아들이 컸다면, 자네처럼 컸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

길을 정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너 정말…!”

“이십구호.”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파르르 떨리는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에게는 그녀의 이야기가 있겠지. 하지만 나에게도 있다.

나의 이야기가.

“내일부터는 다시 삼십호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까지는 왕소홍으로서 움직이고 싶습니다.”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데?”

“아무 의미도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선의를 이미 받아버렸습니다.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지 않고서야, 잠을 잘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나마 말이 통하는 녀석이 짝으로 들어온 줄 알았는데…”

이십구호가 어깨를 축 늘어떨어트렸다.

“더 미치광이가 왔네…”

“죄송합니다.”

이십구호가 내게서 떨어졌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조각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이었다. 나는 그녀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

석양이 완전히 졌다. 밤의 시간이 찾아오고 있었다.

오랫동안 고민하던 그녀가 고개를 내렸다.

“짐 챙겨. 헛소리는 그만 듣고 싶으니까.”

…결국 들어주지 않는다는 건가.

나는 그녀의 의견마저 반대하면서 일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이십구호에도 피해가 가는 행동일 테니.

짐을 챙겼다. 몇몇 식량을 보따리에 묶어 검집 끝에 매달자 이십구호가 턱을 까딱였다.

“뭐해?”

“짐을 챙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무슨 소리야. 검 챙기라고. 날도 어두워졌고, 저택에 잠입하기 딱 좋네. 귀영보는 어때? 내공이 조금 생겼으니까 담벼락 하나 정도는 소리 없이 넘을 수 있겠지? 애초에 사고가 났으니까 경계 병력 체계도 흐트러졌을 거야. 문주의 죽음은 그 정도로 의미가 클 테니까.”

“…이십구호?”

“멍청아. 뒷이야기가 있었으면 그것부터 말해야지.”

이십구호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졸지에 같이 받아버렸잖아. 선금. 살수가 선금을 받은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 되지. 거기다가 나도 오늘까지는 왕소홍의 아내야. 이십구호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살짝 달아오른 뺨이 보였다.

“부, 부부는 일심동체잖아. 멍청아. 바보짓에 어울려줄게. 하지만 밤이 끝나면, 일이 어떻게 됐든 이곳을 떠날 거야. 명심해.”

“……!”

다행이다.

그녀가 이호 같은 인간이 아닌 이십구호라서.

“하하!”

“뭐, 뭘 끌어안아?! 미쳤어?! 내가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

몇 대 얻어맞았지만 상관없었다.

그보다 더 기뻤기에.

“계획은? 날 여기까지 끌어들였으면 그럴싸한 걸 내놓아야 할 거야.”

“뒷문의 담벼락을 뛰어넘어, 지붕을 탈 생각입니다. 기척을 최대한 줄여 중심 건물까지 잠입하죠.”

“나는 가능해. 하지만 너는?”

“다행히 최근에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귀영보를 펼쳤다. 패도적이기 짝이 없는 흑천부의 문주와 도끼를 맞대고 나서일까.

귀영보 자체의 움직임에 소리를 약간이나마 없앨 수 있었다. 물론 불완전하지만, 아슬아슬하게 합격점은 되는 듯했다.

“…약간이지만 형의 틀이 더 세심하게 잡혔네. 내가 조금만 도우면, 소리 없이 움직이는 게 가능할 거 같아.”

“좋습니다. 가시죠.”

“잠깐. 마음의 준비 좀 하고. 대형 사고를 칠 준비가 안 됐어.”

그녀가 심호흡했다. 나는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이십구호는…어째서 절 돕는 겁니까?”

“네가 도와달라며.”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아. 됐어. 선금 어쩌고도 받았고, 내공 또한 늘었으니까. 그냥 난 말하던 도중에 깨달았을 뿐이야.”

“무엇을 말입니까?”

“마곡이라는 지옥에 들어가기 전에 꿈꾸던 것. 나는 한 사람을 지독히 미워해. 그리고 그 사람처럼은 되지 않자고 맹세했지. 하지만…마곡에 있는 동안 잊고 있었어. 살아남기 급급했으니까.”

이십구호가 복면을 얼굴에 썼다.

“내가 내뱉었던 말들이 그를 닮은 거 같아서 뒤늦게 소름이 돋았을 뿐이야. 그뿐이라고. 결코 널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니까 그런 줄 알아.”

“…혹시 부끄러워하는…?”

“죽고 싶어?! 일에나 집중해! 지금부터 삐끗하면 가뜩이나 화난 흑천부 무사들 사이로 굴러떨어지는 거니까!”

이십구호가 내게 눈짓했다.

“네가 앞장서. 뒤를 받쳐줄게. 가자. 삼십호.”

“…예.”

나는 담벼락에 발을 올렸다.

귀영보를 펼쳤다.